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 사모스의 명문에서 출생하였다.
후에 크로톤에 이주하여 종교단체 겸 학술 단체 즉 일종의 학파를 형성하고
남이탈리아 귀족주의 당파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파의 압박을 받고 메타폰티온으로 도망쳐 거기서 죽었다.
그의 학파는 당시의 문예 부흥 운동에 학문을 결부시키려 하였다.
또한 영혼의 윤회, 사후의 응보를 믿으며 영원의 정화를 위하여
금욕과 계율에의 복종을 중히 여기고 원시적 타부(taboo)의 흔적을 나타내는 계율,
아폴론의 숭배의 주요 관념인 결신등을 믿었다.
그들은 이 영혼을 진정시키는 음악과 여원 불변의 진리를 가르치는 수학의 연구에 전진했다.
그에 의하면 수는 만물의 근본 물질이며 원형이고,
만물은 수의 관계에 따라서 질서있는 코스모스(그 자체 속에 질서와 조화를 지니는
우주 또는 세계)를 만든다고 하였다.
우주를 질서의 뜻을 가진 코스모스라 이름 지은 것도 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수학을 영혼의 정화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하학, 수론, 측량술, 계산술의 단계를 넘어서 이론에까지 발전되었다.
수를 만물의 원리로 삼은 것은 수학, 천문학의 발달에 좋은 자극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조급히 수 및 그 관계를 자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하여,
무의미한 수의 심비주의에 빠져버린 결과가 되었다.
이 학파는 수학적 법칙이 우주를 관철하고 있음을 주장하여,
수학을 실용수학의 영역에서 이론수학으로까지 높인 점에서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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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생애
그리스의철학자*수학자*종교가인피타고라스(Pythagoras,580?-500?B.
C)의 생애는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
나, 탈레스의 권고를 따라 수학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유학한 뒤, 고향에 돌아와 종교색이 짙은 학
교를 열었으나, 때마침 사모스에는 포리크라데스가 학정을 실시하여
자유가 없었으므로 그리스의 식민지인 남부 이탈리아의 시실리(시칠리
아섬)에서 타렌트로 이어서 크로톤으로 옮겨가며 학교를 창설하여 명
성을 떨쳤습니다.운좋게도 그는 그곳에서 당대 최고 부자이자 역사상
가장 힘이 좋았다는 밀로(Milo)의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피타
고라스의 명성을 익히 들어온 밀로가 당연한 일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
다. 그렇다고 밀로가 명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 오히려 "당대의 현인"
혹은 "사모스섬의 현인"이라고 불려지던 피타고라스보다도 더 많은 지
지를 받는 유명한 인사였던 것입니다. 잠시 밀로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밀로는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으로 올림픽에 나가 열 두번이나 우승한
불세출의 운동선수였습니다. 밀로는 운동뿐만 아니라 철학과 수학에
도 많은 관심이 있어서 피타고라스에게 이런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근처에 자신의 소유로 되어있는 건물 한 곳을
내주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 학회"인 것입니다.
이 학교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진리를 갈구하는 많은 젊은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어 그 수는 300을 넘었으며, 그 당시 공개 석상에 나
오지 못하게 되어 있던 여자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그의 강의를 들었다
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최고 운동선수와 "사모스의 현인"이라
는 칭호의 대상이였던 피타고라스밑에서 수업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
운 일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여자라 하면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고 자신의 발언권도 가지지 못하는 형편이였다. 몇 몇의 여자 제자
가운데 피타고라스의 결혼녀가 있었다. 바로 밀로의 딸 테아노
(Theano)였다. 이들은 많은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게 된다. 테
아노는 역사상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여자 수학자로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학생들을 '피타고라스 학도'라는 정식 학생과 청강생으
로 나누었고, '그리스인 중 가장 현명하고 가장 용감한 자'라는 존칭을
받은 피타고라스는 흰 까운에 별 모양의 5각형 무늬를 새긴 황금관을
쓰고 위풍 당당하게 교단에 섰다고 한다. 그리고 학도들은 배운 내용
에 관해서는 일체 비밀을 지켰으며 특히 정식 학도들은 간소한 생활,
엄격한 교리, 극기, 절제, 순결, 순종의 미덕증진을 목적으로 단체 행동
을 하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이들은 피타고라스의 수업을 완전히 이
해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새로운 정리를 만들어 내곤 하였다. 이
학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학회에 헌납
했다. 하지만 학회를 탈퇴할 시는 자신의 재산에 2배를 가지고 나갔다.
또한 탈퇴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까지 세워 주었다고
합니다.
영혼의 불멸을 논하는 일종의 종교 단체로서 의식을 거행하고, 그
제자들의 발견은 모두 피타고라스의 것으로 하고, 또 그 발견을 외부
에 누설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 교단은 일대 세력을 갖게 되
었고, 각 방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된 동시에 질시의 표적이 되어 드디
어 정치적 반대파로부터 불의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피타고라스당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부녀자들을 배에 태워 시실리 방면으로 미리
피난시키고 피타고라스를 호위하면서 메소포타미아쪽으로 도망을 갔으
나 추격은 점점 심해지고 따르는 문하생도 하나 둘씩 떨어져나가 드디
어 피타고라스는 메타폰톰에서 체포되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
7현 중의 한 사람인 그의 말로는 아르키메데스처럼 비장한 것이었습니
다. 이때에 피타고라스의 학교는 불태워졌으며, 그의 학파는 그리스의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약 200년간 활동하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원리를 수(數)에 두고, 세계를 수적 관계 또는 비
례에 기초를 둔 음악적인 일대 조화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에서의
조화의 관계에 의한 영혼의 정화(淨化)를 인생의 최대 목적으로 삼았
고 오르페우스교적 신비주의에 의하여 영혼의 불멸과 윤회를 믿고 엄
격한 금욕생활을 하였습니다. 당대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수학에서는 직각삼각형에 관한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유명하며, 천문학에서는 천동설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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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철학
1.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 태어난 아테네 시민이었으며, 청년들에게 철학을 가르치거
나 여러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기원전 399년에 반국가 활동을 했다는 이
유로 유죄선고를 받고 독약에 의해 사형당했다. 그는 세속에 대한 재산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에서 후기의 스토아 학파의, 최고선으로서의 덕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퀴닉 학
파의 전조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최고 관심사는 선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 죄를 짓는
까닭은 지식의 부족 때문이며, 죄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無知이다. 따라서 선에 도달하
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지식을 가져야 하며, 선은 곧 지식이 된다. 그리하여 이런 윤리적
문제들을 토론을 통해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그가 사용한 방법이 변증술이다. 소크라테
스는 자신의 지혜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고서 지혜로운 체 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폭로하
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가난한 삶을 살고, 끝내는 사형선고를 받았지
만, 델피의 신탁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2. 플라톤과 아카데미
플라톤은 귀족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형 선고 이후에 모든 야
망을 버리고 철학에 투신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후 플라톤은 아카데미(Academy)라는 학
교를 지었다. 아카데미는 중세 이후 등장한 여러 대학들의 원조이다.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교과목은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치던 과목들과 거의 같았으며, 특히 수학에
큰 비중을 두었다. 아카데미의 교육 목적은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을 변화하는 경험세계로부
터 그 근저에 있는 불변의 구조에로, 즉 생성에서 존재로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이들 교과목
중 어느 것도 자기 완결적인 것은 없었으며, 각 과목의 끝부분에는 반드시 변증술의 규범들
을 포함시키도록 되어있었다. 중요한 것은 아카데미의 교육목적으로 이성의 빛에 의해 스스
로 생각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정신을 훈련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관련된 어떠한 목표도 고
려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카데미와 소피스트들의 차이점이다.
3.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
이데아 이론은 여러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에 의해 상술되고 있는데, 원래 피타고라스 학
파에서 나온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감각 기관을 통해 파악하는 개별적인 사물들은
상반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 자체는 우리의 감각기관
을 통해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지식으로서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
스는 새로운 이론인 이데아 이론 을 만들어 냈다. 이데아는 그림이나 원형을 뜻한다. 이데아
이론은 논리적인 측면과, 형이상학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데아 이론은 플라톤은
끝까지 고수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이데아 이론은 형상과 개별자들 사
이의 관계를 참여 이론으로 설명하는 데 실패함으로서 엘레아 학파에 의해 심한 공격을 받
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이론을 고수했으며, 이 문제의 해결방안이 논증들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암시하고 있다.
4. 플라톤의 정치 이론
플라톤의 대화편 중 <국가>는 이상국가에 대해서 논의되고 있는 작품이다. <국가>에서
제시되는 이상국가는 통치자, 군인, 평민의 세 계급으로 분류되는 시민으로 구성된다. 통치
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 방식은 엄격한 공산주의이다. 플라톤의 正義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열심일 때 구현된다. 즉, 조화의 개념과도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국가는
시민이 국가의 하인으로서 취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국가>에 그려진 이상국가는 소크
라테스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요점은 여기서의 이상국가라는 것
은 실은 국가를 경영할 적절한 방법에 대해 과학자가 한 번 가져볼 수 있는 통찰이며 하나
의 모델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후기 대화편 속에서 도시국가의 다양한 정치
체제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최선의 체제는 법의 원칙 아래에서 일인 통치와 다
수 통치를 결합한 체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5. 플라톤의 교육 이론
정치 이론에 있어서는 소크라테스적인 것과 플라톤적인 것이 구별되지만, 사회 이론 분야
에 있어서는 두 사람에 공통되는 특징이 다소 발견된다. 그것은 교육의 본질에 대한 견해이
다. 그들은 교육이란 단지 지식을 나누어주는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교사의 역할은 학생이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얻어낼 수 없으므로, 스승과 학생이 서로 상호작용함으로서
획득되도록 해야한다. 즉, 교육이란 교사의 지도아래 학생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며, 두 사람이 언제나 함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배움의 과정이 지닌
특징이다. 후기 피타고라스 학파들은 윤회설을 신봉하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
가 주장했던 윤회설과 연관시켜 생각했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 교육이란 영혼을 치료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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