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꽃
도종환
꽃은 더디 피고
잎은 일찍 지는 산골에서
여러 해를 살았지요.
길어지는 나무들의 동안거를 지켜보며
나도 묵언한 채 마당이나 쓸었지요.
내 이십대와 그 이후의 나무들도
늦되는 것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늦게 피는 내게 눈길 주는 이 없고
사랑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낙화는 빨리 와
꽃잎 비에 젖어 흩어지며 서른으로 가는 가을은
하루하루가 스산한 바람이었지요.
내 마음의 꽃잎들도 젖어 뒹굴며
나를 견디기 힘들어했지요.
이 산을 떠나는 날에도 꽃은 더디 피고
잎은 먼저 지겠지요.
기다리던 세월은 더디 오고
찬란한 순간은 일찍 지평에서 사라지곤 했으니
내 남은 생의 겨울도 눈 내리고 서둘러 빙판 지겠지요.
그러나 이 산에 내 그림자 없고
바람만 가득한 날에도 기억해주세요.
늦게 피었어도 그 짧은 날들이 다 꽃피는 날이었다고,
일찍 잎은 지고 그 뒤로 오래 적막했어도
함께 있던 날들은 눈부신 날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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