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프로그래머 L(여ㆍ30)씨는 생활정보지를 읽다 눈이 번쩍 뜨였다.
신용 불량자에게도 8~11%의 이자로 신용 대출을 주선한다는 광고였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치료비와 생활비로 고민하던 때였다.
L씨의 전화를 받은 남자는
“적금을 들어 1회분을 입금하면 이를 담보로 돈을 빌리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대출을 원하면 인터넷 뱅킹에 가입한 뒤
주민등록번호ㆍ비밀번호ㆍ보안카드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의심을 품었던 L씨는 그러나 “입금 전에 비밀번호를 바꾸고
보안카드 분실 신고까지 하면 안전하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L씨는 인터넷 뱅킹을 신청하고 개인 정보를 알려줬다.
지시대로 다음날 대출 약속을 받은 4000만원의 10%인 400만원을 입금했다.
물론 비밀번호를 바꾸고 보안카드도 분실 신고를 낸 뒤였다.
그러나 약속한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입금했던 400만원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영문을 모르는 L씨는 부랴부랴 알선업자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찰청사이버대응센터는 2일 대출 알선을 미끼로 L씨 등 피해자 18명으로부터
총 9000여만원을 뜯은 혐의(사기)로 이모(37)씨를 구속했다.
범행을 도운 아내 임모(35)씨도 불구속했다.
수사 결과 이씨 부부는 인터넷 뱅킹의 ‘예약 이체’ 기능을 범행에 악용했다.
예약 이체는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지정된 계좌로 돈을 보내는 기능이다.
현재 시중 은행의 예약 이체는 계좌비밀번호와
천인성 기자
보안카드가 변경돼도 별도 조치가 없으면 원래 설정한 대로 송금한다.
이씨는 피해자가 제공한 개인 정보로 인터넷 계좌에 접속, 몰래 예약 이체를 설정했다.
때문에 피해자가 보안카드 분실 신고를 했음에도
돈은 고스란히 이씨가 지정한 계좌로 옮겨졌다.
이병귀 사이버수사실장은
“피해자들은 애초 해킹 범죄를 신고했으나 수사 결과
인터넷 뱅킹의 헛점을 신종 수법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담보가 없거나
신용도가 낮아 금융권 대출을 받기가 어려운 서민이었다.
L씨처럼 어렵게 마련한 돈을 잃었다는 절망감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신종 사기 수법의 등장에 따라 경찰청은 보안카드 분실 신고나 비밀번호를 변경하면
예약이제ㆍ자동이체 내역을 공지하는 등
개선책을 마련하도록 금융당국과 은행에 통보했다.